학문의 틈 -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는 방식

학문의 틈 —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는 방식
글 · 틈의 기록 | 2025.12.09
“언어의 경계는 곧 내가 가진 세계의 경계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논리철학논고』
Ⅰ. 언어가 사고에 남기는 보이지 않는 자국
우리는 생각을 언어로 표현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언어가 먼저 틀을 만들고 그 틀 안에서 사고가 자리를 잡는다. 마치 거푸집에 따라 모양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인식하는 방식은 사용하는 언어가 가진 구조와 규칙에 깊게 영향을 받는다.
언어학자 에드워드 새피어(Edward Sapir)는 “인간은 자신이 속한 언어의 세계를 벗어나 순수하게 사고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언어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사고의 방향을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규범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보기’라고 믿는 인지는 실은 언어가 만들어 놓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학문의 틈, 즉 사고와 언어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간극이 발생한다.
Ⅱ. 단어 하나가 인식의 방향을 바꾸는 순간
심리학자 엘리너 로시(Eleanor Rosch)의 연구는 이름 붙이는 행위가 분류와 인식의 방식을 완전히 달라지게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특정 단어로 규정하는 순간 사고는 그 범주 안에서 더 좁게, 혹은 더 넓게 움직인다.
예를 들어 ‘시간은 흐른다’는 표현은 시간이라는 개념을 물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시간을 쓴다’는 표현은 시간을 자원처럼 바라보게 만든다. 단어 하나의 차이가 사고의 지형을 완전히 다르게 조형하는 것이다.
언어가 제공하는 은유는 인식의 지도를 그리고 그 지도 위에서 우리는 사고라는 여행을 한다. 여기에서 다시 틈이 생긴다. 같은 말을 사용해도 각자 다른 지도를 품고 있기 때문에.
Ⅲ. 언어가 지배하는 사고의 흐름, 그리고 그 틈의 발견
언어가 사고를 결정짓는다는 관점은 강한 언어상대성이라 불리며 오랫동안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최근 인지과학 연구들은 언어가 사고를 ‘완전히’ 규정하진 않지만, 사고의 우선순위와 접근 방식에는 결정적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버드대학교의 레라 보로디츠키(Lera Boroditsky)는 언어가 방향 감각, 시간 개념, 사물의 성별 지각에 실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했다. 같은 상황을 보더라도 언어가 다른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설명하고 원인을 파악했다.
결국 사고의 과정에는 우리가 선택했다고 믿는 판단과 언어가 우리 대신 만들어놓은 길 사이에 미묘한 간극이 존재한다. 이 틈을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사고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Ⅳ. 언어의 틈을 자각할 때 사고는 비로소 확장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하면 사고도 그 틀에 갇힌다. 그러나 언어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사고의 경계는 부드러워진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언어의 균열에서 새로운 사유가 태어난다”고 말했다. 언어가 복잡한 세계를 모두 담을 수 없기 때문에 그 틈에서 새로운 개념과 연결이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학문의 틈이 의미를 갖는다. 언어가 말하지 못한 영역, 단어가 포착하지 못한 감각을 바라볼 때 인간의 생각은 기존의 규칙을 넘어 새로운 사고의 폭을 확보하게 된다.
Ⅴ. 결론 — 언어의 틈에서 사고는 다시 태어난다
언어는 사고를 돕는 도구이지만 동시에 사고의 자유를 제한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언어 안에서 생각하지만 언어 밖에서 세계를 느끼는 인간에게 그 틈은 언제나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배가 만들어낸 틈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 틈이야말로 더 넓은 사고로 이어지는 출입구다.
결국 언어의 틈을 발견하는 일은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일이자, 사고를 한 단계 확장하는 작업이다. 틈을 이해할 때 사고는 비로소 다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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