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의 틈 — 순간과 여백 사이
글 · 틈의 기록 | 2025.11.09
“인생은 순간과 순간 사이의 기다림이다.”
— 알베르 카뮈
Ⅰ. 찰나 속에 머무는 사유
우리에게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순간이 지나간다. 하지만 진정으로 머무는 순간은 얼마나 될까.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사유는 멈춤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생각은 멈추는 법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멈춤의 순간에야 비로소 우리는 스스로를 마주한다. 찰나의 정적 속에서, 존재는 스스로를 묻는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불교의 가르침처럼 ‘찰나’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간의 단위이지만, 그 안에는 영원의 깊이가 숨어 있다.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는 일, 그것이 곧 존재의 증명이다.
Ⅱ. 여백이라는 공간
일본 미학에서 말하는 ‘마(間)’는 여백의 철학을 가장 잘 설명한다. 그것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의미가 자라나는 틈이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는 “음악은 음표가 아닌 음표 사이의 침묵에 있다”고 했다. 여백이 있기에 소리가 살아나고, 침묵이 있기에 의미가 선명해진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해야 할 일과 만나야 할 사람들로 가득 찬 하루 속에서도 잠시 멈춰 서는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삶의 결을 잃는다. 자칫 매너리즘과 번아웃에 빠질 염려도 있다. 여백은 단절이 아니라, 사유가 숨 쉬는 공간이다. 비어 있기에 채워질 수 있고, 멈추기에 다시 걸을 수 있다.
“침묵은 모든 철학의 시작이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Ⅲ. 순간과 여백의 공존
순간은 살아 있음의 증거이고, 여백은 그 삶을 지탱하는 틀이다. 찰나가 불꽃처럼 타오른다면, 여백은 그 불빛을 비추는 어둠이다.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두 개는 언제나 짝을 이룬다.
철학자 니체는 “영원회귀는 찰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라 했다. 지금 이 순간이 다시 돌아온다 해도, 기꺼이 반복되길 바라는가? 여백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한 공간이다. 삶을 다시 바라보는 거리, 그 거리가 바로 사유의 틈이다.
Ⅳ. 사유의 틈에서 배우는 일
우리는 늘 ‘해야 할 일’에 쫓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생각해야 할 일’을 위해 시간을 비워두는 사람은 드물다. 철학은 그 비워진 시간 속에서 태어난다. 답을 찾기보다 질문을 품고, 판단보다 이해를 유예하는 그 순간에 사유는 자란다.
사르트르는 “존재는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 관계가 이어지는 방식 속에서도 ‘틈’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틈을 두려워하기보다, 바라보는 태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을 받아들인다.
“멈춤이 없으면 사유는 없다.”
— 마르틴 하이데거
Ⅴ. 결론— 여백이 남긴 질문
순간은 우리를 살아 있게 하지만, 여백은 우리가 ‘왜 사는가’를 되묻게 만든다. 그 질문은 언제나 미완성의 형태로 남아, 다음 순간을 향한 사유의 불씨가 된다.
여백은 부족함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완벽하지 않은 문장, 다 닫히지 않은 문틈, 그 속에서 우리는 다시 사유하고, 다시 살아간다. 철학의 틈은 바로 그 미세한 여백에서 시작된다.
“모든 철학은 틈에서 시작된다.”
— 장 폴 사르트르
오늘 당신이 잠시 멈춘 그 순간이, 어쩌면 사유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여백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 2025 틈의 기록 | 사유의 여백과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철학의 틈’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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