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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에서 답을 찾다/사람의 틈

사람의 틈 — 친구 사이의 거리감에 대하여

by Viaschein 2025. 10. 30.

 사람의 틈


Ⅰ. 다시 만나도 어딘가 낯선 얼굴

민지는 오랜만에 수진을 만났다. 대학 시절, 새벽까지 이야기하며 웃던 친구였다. 둘은 카페 구석 창가에 마주 앉았다. 커피잔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동안, 대화는 어색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표면만 흘렀다.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으며 웃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힘이 없었다.

수진은 회사에서 맡은 프로젝트 이야기를 했다. “요즘은 거의 밤 10시 넘어야 퇴근해. 그래도 재밌긴 해.” 민지는 그 말을 들으며 미소를 지었지만, 말없이 시선을 커피 위에 떨구었다. 자신은 몇 달째 일을 쉬며, 그저 느리게 지내고 있었다. 창밖의 햇살이 따뜻했지만, 마음속에는 묘한 한기가 돌았다.

“우리 예전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얘기가 끝이 없었잖아.” 민지가 말하자, 수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웃었다. “그땐 우리 둘 다 시간이 많았잖아.”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이제는 다르다’는 선언이 담겨 있었다. 민지는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꼈다. 그녀는 여전히 그 시절의 ‘우리’를 붙잡고 있었지만, 수진은 이미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Ⅱ. 보이지 않게 멀어지는 사람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민지는 자꾸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수진에게 다시 연락해야 할까, 아니면 이 정도의 거리감을 그냥 받아들여야 할까. 예전의 친밀함을 억지로 되돌리려는 건 오히려 더 불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계속 허전했다. 그 허전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민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과거의 사진들을 스크롤했다. 같은 프레임 속에서 웃고 있는 두 사람. 그때는 서로의 생각을 다 알고 있다고 믿었는데, 이제는 그 사진 속 미소가 너무 먼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는데, 왜 이렇게 멀어졌을까.” 그녀의 마음속에는 설명되지 않는 공백이 자리 잡고 있었다.


Ⅲ. 관계의 리듬이 어긋날 때

친구 사이의 거리감은 대체 언제부터 생기는 걸까. 심리학에서는 이를 ‘정서적 비동기화(Emotional Desynchronization)’라 부른다. 두 사람이 같은 속도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할 때, 즉 서로의 삶의 리듬이 달라졌는데도 이를 인식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민지는 느린 호흡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고, 수진은 끊임없이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차이는 단순한 ‘성격의 차이’가 아니라 ‘삶의 시간대(Time Zone)’의 차이였다. 서로의 변화에 조율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관계는 서서히 비틀린다. 그 틈은 싸움처럼 크고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화의 리듬이 맞지 않고, 웃음의 타이밍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Ⅳ. 성장의 속도가 다를 때 생기는 틈

관계의 틈은 종종 ‘성장 속도의 간극(Gap of Growth Tempo)’에서 비롯된다. 어느 한쪽은 빠르게, 다른 한쪽은 천천히 변화한다. 하지만 서로를 예전의 기준으로 계속 바라볼 때, 그 차이는 ‘오해’로, 그리고 ‘거리’로 굳어진다.

사회심리학자 Levinger(1980)는 인간관계를 ‘발생 → 유지 → 침체 → 단절’의 순환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유지’란 단순히 같은 상태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조율’과 ‘갱신’을 의미한다. 관계를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새롭게 만나야 한다. 즉, 어제의 친구를 오늘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Ⅴ. 관계를 되살리는 한 가지 방법

친구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다시 인식하기’ — 과거의 그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그 사람을 새롭게 보는 일이다. 그 사람이 여전히 나와 같아야 한다는 기대를 내려놓고, 변화한 모습 자체를 이해하려는 태도에서 관계는 다시 숨을 쉰다.

친구와의 대화 주제를 과거의 추억에서 현재의 고민으로 옮겨보자. 그가 요즘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것. 그 작은 질문이 관계의 리듬을 다시 맞추는 첫 걸음이 된다. 관계 회복은 과거로의 귀환이 아니라, 현재를 함께 살아내는 감정의 조율이다.


Ⅵ. 틈이 있다는 것의 의미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었다. 오랜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느껴지는 낯섦, 그 낯섦이 마치 나의 변화까지 비춰주는 듯했다. 그때 깨달았다. 우리가 멀어진 게 아니라, 그저 각자의 방향으로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라고.

사람 사이의 틈은 어쩌면 성장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 간극 속에서 우리는 상대뿐 아니라, ‘지금의 나’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틈을 메우는 일이 아니라, 그 틈을 인정한 채 서로의 다름 위에 다리를 놓는 일이다.


Ⅶ. 완벽한 관계는 없다

우리는 완벽한 관계 속에서 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완전함과 오해, 그리고 간극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중요한 건 틈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틈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용기다.

“사람 사이의 틈은 관계의 끝이 아니라, 이해가 다시 시작되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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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 예고 — 연인 사이의 감정 온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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