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틈의 사유

빈 칸의 철학 - 우리는 왜 계획부터 세우는가

by Viaschein 2026. 1. 12.

빈 칸의 철학 — 우리는 왜 계획부터 세우는가

틈의 기록 · 2026.01.12
"불확실성은 인간이 가장 견디기 어려워하는 상태다." — 지그문트 바우만

 

Ⅰ. 빈 칸 앞에 앉는다는 것

 

다이어리를 펼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하루를 마주할 때, 우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다음 행동을 결정한다. 무엇을 할지, 어디에 시간을 쓸지, 어떤 결과를 남길지. 빈 칸은 질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안을 먼저 불러온다. 이 하루가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가 버리면 어쩌지 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빈 칸 앞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대신 계획을 적는다. 계획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미리 설명해 주는 문장이다. 그 문장이 채워지는 순간, 하루는 비로소 안전해진다.

 

 

Ⅱ. 계획은 통제의 언어다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단순히 일정을 정리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을 얻는 행위다. 우리는 계획표를 통해 하루가 예측 가능한 형태를 갖추기를 바란다. 예측 가능성은 불안을 줄여주고, 불안이 줄어들면 우리는 스스로를 성실한 사람이라 느낀다.

 

다이어리에 적힌 계획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이미 지나온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현재의 빈 칸을 견디는 대신, 미래의 문장으로 그것을 덮어버린다.

 

 

Ⅲ. 여백을 두려워하는 마음

 

사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여백이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시간은 평가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

다. 그 상태는 성과 중심의 기준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불완전함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보다 답을 먼저 적는다. 무엇을 느낄지는 나중의 일이 되고, 무엇을 할지만이 우선순위가 된다. 여백은 그렇게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빠르게 사라진다.

 

"침묵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으로 가득 차 있다." — 수전 손택

 

Ⅳ. 계획되지 않은 시간의 가치

 

그러나 계획되지 않은 시간은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감정과 생각은 그런 틈에서 생겨난다. 목적 없이 걷던 길에서 떠오른 생각, 아무 일정도 없던 오후에 찾아온 감정은 계획표 안에서는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다이어리의 빈 칸은 실패한 하루의 흔적이 아니라, 아직 결정되지 않은 가능성의 자리다. 그 가능성은 종종 계획보다 늦게 도착하지만, 더 오래 머문다.

 

 

Ⅴ. 우리는 왜 다시 빈 칸으로 돌아와야 하는가

 

계획은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빈 칸이 계획으로 채워질 필요는 없다. 어떤 여백은 그대로 두어야만 제 역할을 한다. 설명되지 않은 시간, 목적 없는 하루는 삶에서 사라져야 할 오류가 아니라 균형을 회복시키는 장치다.

 

빈 칸의 철학은 묻는다. 우리는 정말 시간을 관리하고 있는가, 아니면 불안을 관리하고 있는가. 다이어리 속 여백을 다시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계획 너머의 삶을 만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