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대 선이 작동하지 않는 순간 - 윤리가 멈추는 자리에서
“윤리는 명확할 때보다, 더 이상 명확하지 않을 때 시작된다.”
— 틈의 기록
우리는 오랫동안 몇 가지 문장을 거의 의심 없이 받아들여 왔다. 살인은 절대 악이며, 타인을 돕는 행위는 절대 선이라는 문장들이다. 이 문장들은 윤리를 빠르게 정리해 주고, 판단의 피로를 덜어 주며, 세계를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이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삶은 이 문장들이 작동하지 않는 순간들을 반복해서 만들어 왔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절대 선이라는 개념은 설명을 멈춘다.
Ⅰ. 살인은 언제나 절대 악인가
살인은 인간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박탈하는 행위다. 이 정의만 놓고 보면, 살인을 절대 악이라 부르는 데 주저함은 없다. 문제는 이 정의가, 모든 상황을 설명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핍박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했고, 탈출할 경로도, 협상할 언어도, 저항하지 않을 선택지도 없었다. 그들이 택한 폭력은, 지배를 확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존과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이 살인을 우리는 어떻게 불러야 할까. 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절대 악이라고 단정하는 순간, 우리는 피해자에게 죽음 앞에서도 윤리적으로 완벽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모든 선택이 악일 때, 윤리는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 한나 아렌트
이 지점에서 살인은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비극의 언어로 옮겨진다. 이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 선도 아니고, 쉽게 단죄할 수 있는 악도 아니다. 절대 선과 절대 악의 좌표가 동시에 무력해지는 순간이다.
Ⅱ. 도움은 언제나 선한가
반대로 도움은 거의 예외 없이 선으로 여겨진다. 누군가의 고통을 줄이고, 결핍을 메우며,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드는 행위. 도움은 도덕적 언어에서 가장 의심받지 않는 단어 중 하나다.
그러나 질문은 여기에 있다. 그 도움이 어떤 구조 위에서 이루어졌는가.
범죄로 얻은 자원, 착취로 축적된 부, 혹은 다른 이의 침묵 위에서 유지되는 질서. 그 위에서 행해진 도움은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 주는 동시에, 다른 누군가의 고통을 연장시킬 수 있다.
이 경우 도움은 절대 선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을 가리는 장치가 된다. 우리는 도움의 결과만 보고 선이라 부르지만, 그 도움이 유지시키는 세계는 더 많은 피해를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Ⅲ. 절대 선이 멈추는 자리
이 두 사례는 하나의 사실을 드러낸다. 절대 선은 극단적인 상황 앞에서 판단을 안내하지 못한다. 오히려 판단을 단순화하려 할수록, 현실의 고통은 설명되지 않은 채 남는다.
그래서 절대 선은 지켜야 할 규칙이 아니라, 멈춰야 할 지점으로 남는다. 이 선택이 정말 다른 삶을 짓밟지 않는지, 이 선의가 누구의 침묵 위에 서 있는지, 끝까지 묻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
“확신은 윤리를 완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먼저 윤리를 침묵시킨다.”
— 틈의 기록
절대 선은 그래서 언제나 실패한다. 그러나 그 실패는 윤리의 붕괴가 아니라, 윤리가 시작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답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멈추고, 다시 바라보고, 타인의 삶을 단순화하지 않으려 애쓴다.
어쩌면 우리가 붙들 수 있는 유일한 절대 선은 이것일지 모른다. 쉽게 판단하지 않겠다는 약속. 선과 악의 언어가 작동하지 않을 때, 그 침묵 앞에서 도망치지 않겠다는 태도. 윤리는 언제나 그 틈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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