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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의 사유

지워진 기록 - 처음의 다짐은 어디로 가는가

by Viaschein 2026. 1. 13.

지워진 기록 — 처음의 다짐은 어디로 가는가

틈의 기록 · 2026.01.13
"의지는 결심하는 순간보다 사라지는 순간에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 — 한나 아렌트

 

Ⅰ. 다짐이 가장 선명한 순간

 

다이어리의 첫 장에는 유난히 단정한 문장들이 적힌다. 또박또박 쓴 글씨, 지우개 자국 하나 없는 다짐들. 우리는 그 순간의 확신을 믿는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이 문장은 끝까지 남을 것이라고.

 

새해의 다짐은 미래를 향한 약속이기보다 현재의 불안을 잠재우는 문장에 가깝다. 무엇을 할 것인지 정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얻는다.

 

 

Ⅱ. 지워지기 시작하는 문장들

 

그러나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다이어리 속 문장들은 희미해진다. 어떤 다짐은 지워지고, 어떤 것은 아예 다음 페이지로 옮겨 적히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실패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방향이 달라졌을 뿐일지도 모른다.

 

다짐이 지워지는 순간에는 늘 작은 합리화가 따라온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그 말들 속에는 변한 마음과 여전히 남아 있는 기대가 함께 섞여 있다.

 

 

Ⅲ. 지속보다 변화에 가까운 마음

 

우리는 흔히 다짐의 가치를 지속성으로 판단한다. 끝까지 지켰는가, 중간에 포기하지는 않았는가.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지속보다 변화에 더 가까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이어리에 남지 않은 다짐들은 의지가 약해서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 다짐을 세웠던 이유가 더 이상 현재의 나와 맞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록은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진다.

 

"변하지 않는 결심보다, 변화를 인식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 — 미셸 드 몽테뉴

 

Ⅳ. 지워진 자리의 의미

 

다이어리에서 지워진 문장 자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흔적이 남아 있다. 연필 자국, 흐릿해진 잉크, 덮어 쓴 글씨. 그것은 우리가 한때 진지했음을 증명하는 흔적이다.

 

지워진 기록은 실패의 표식이 아니라, 삶이 실제로 움직였다는 증거다.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았기에, 우리는 수정하고 다시 쓰는 법을 배운다.

 

 

Ⅴ. 다짐 이후의 시간으로

 

어쩌면 중요한 것은 다짐을 끝까지 지키는 일이 아니라, 지워진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대하는가일지도 모른다. 다짐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공허가 아니라, 조금 더 현실적인 선택이다.

 

지워진 기록은 묻는다. 우리는 처음의 마음을 배신한 것인가, 아니면 더 정확한 자신에게 다가간 것인가. 다이어리에 남지 않은 다짐들은 그렇게 또 하나의 틈이 되어, 우리를 다음 문장으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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