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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의 사유

틈의 사유 - 건설의 속도가 느려진 도시에서

by Viaschein 2026. 1. 12.

틈의 사유 - 건설의 속도가 느려진 도시에서

틈의 기록 · 2026년 1월 12일

도시는 오랫동안 빠르게 자라는 존재였다. 새로운 도로가 생기고, 건물이 올라가며, 숫자는 늘어났다. 건설은 성장의 가장 명확한 증거였다.

 

그러나 지금의 도시는 더 이상 같은 속도로 확장되지 않는다. 분양은 줄었고, 대규모 개발은 미뤄졌으며, 건설 산업은 ‘얼마나 더 지을 수 있는가’보다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를 먼저 묻고 있다.

 

 

Ⅰ. 멈춘 것이 아니라, 방향이 바뀐 것

 

건설 경기가 둔화되었다는 말은 흔히 위기의 언어로 사용된다. 하지만 현장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일의 성격이 달라지고 있다는 감각에 가깝다.

 

새로 짓는 건물은 줄어들었지만, 노후 인프라 보수, 공공 시설 개선, 도시 재생, 그리고 조경과 환경 설계의 비중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도시는 더 이상 커지지 않지만,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Ⅱ. 확장의 시대가 만든 언어의 한계

 

우리는 오랫동안 건설을 ‘확장’의 언어로만 설명해 왔다. 면적, 물량, 속도, 수익성. 이 기준에서 보면 유지와 관리 중심의 산업은 언제나 덜 성장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유지에는 다른 종류의 시간이 필요하다. 빨리 짓는 능력보다 오래 버티게 만드는 기술, 크게 만드는 설계보다 오래 쓰이게 하는 판단. 이 시간은 숫자로 쉽게 환산되지 않는다.

 

도시가 성숙해질수록 건설은 ‘증가’의 기술이 아니라 ‘지속’의 기술이 된다.

 

Ⅲ. 공공 발주가 늘어난다는 신호

 

민간 개발이 위축되면서 공공 발주의 역할이 다시 커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경기 보완책이 아니라, 도시가 어떤 단계에 들어섰는지를 보여주는 신호다.

 

공공 인프라는 수익보다 필요를 기준으로 움직인다. 당장의 효율보다 장기적인 안정, 단기 성과보다 사회적 지속성을 고려한다. 건설 산업이 공공 영역과 다시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도시의 시간이 바뀌고 있음을 의미한다.

 

 

Ⅳ. 조경과 공공 공간이 남기는 것

 

이 변화 속에서 조경과 공공 공간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건물을 하나 더 짓지 않아도, 사람들이 머무는 방식은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를 심고, 동선을 정리하고, 그늘과 쉼의 공간을 만드는 일은 눈에 띄는 성장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도시를 ‘살 수 있는 곳’으로 유지하게 만든다.

 

Ⅴ. 우리는 무엇을 성장이라 부를 것인가

 

이제 건설 산업은 질문 앞에 서 있다. 더 많이 짓는 것이 더 좋은 일인가, 아니면 이미 지어진 것들을 잘 돌보는 것이 더 중요한가.

 

도시가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면, 성장의 기준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 느려진 건설의 속도는 실패의 신호가 아니라, 다른 책임이 시작되었다는 징후일지도 모른다.

 

도시는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때, 비로소 돌봄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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