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틈 - 인간관계에서 ‘기대’가 갖는 무게

글 · 틈의 기록 | 2025.12.10

“기대는 관계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관계를 가장 무겁게 만든다.”
—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Ⅰ. 기대는 조용히 관계의 구조를 만들고 있다

우리는 누구와 관계를 맺든, 말하지 않은 기대를 품는다. 친밀한 관계일수록 그 기대는 더 자연스럽고, 더 투명하게 섞여든다.

그러나 기대는 의도와 다르게 작동한다. 우리는 기대를 ‘바람’으로 생각하지만, 상대가 그것을 알아주길 바라는 순간 기대는 관계의 규칙으로 바뀐다.

문제는 대부분의 관계에서 이 규칙이 ‘합의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기대는 충족될 때보다 충족되지 않을 때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당신은 중요한 날에 친구가 먼저 연락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 순간 마음이 살짝 흔들린다. 실망, 서운함, 불편함 같은 감정들이 묵직하게 스며든다.

그런데 이 감정은 친구의 행동 때문이 아니다. 실제 원인은 말하지 않은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작은 틈’은 일상에서 끝없이 반복된다. 먼저 챙겨주리라 생각했던 일들, 알아주길 바랐던 마음들, 자연스럽게 해주리라 기대했던 배려들.

틈은 이런 장면에서 조용히 자라난다.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 사람은 빈자리를 해석으로 채우기 시작한다.

“내가 그만큼 중요한 사람은 아닐까?” “나만 이렇게 애쓰고 있는 걸까?” “원래 이런 관계였던 건가?”

이러한 해석은 관계의 분위기를 바꾸는 힘을 가진다. 실제로 상대의 행동은 그대로인데도 관계의 ‘온도’가 달라졌다고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문제는 기대가 틀렸던 것이 아니라, 기대가 설명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틈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를 다시 정의하는 사건이 된다.

기대를 말하는 일은 상대를 통제하기 위한 요구가 아니다. 오히려 관계의 구조를 단단하게 만드는 가장 현실적인 조율이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해주면 고마워.” “나는 이런 부분에서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이런 말들은 관계의 무게를 줄여준다. 기대가 명확해질수록 상대는 불필요한 짐을 덜고, 관계는 불필요한 오해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대를 나누는 과정에서 서로의 우선순위가 보인다는 점이다. 관계가 진짜 가까워지는 순간은 감정의 공유가 아니라 ‘기대의 조율’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기대를 갖는 것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일이다. 다만 그 기대가 *말해지지 않은 규칙*이 되어 상대를 조용히 시험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관계는 서로의 기대를 짐작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기대를 조율하는 곳이다.

사람의 틈은 거창한 사건에서 생기지 않는다. 대부분은 아주 작은 지점 - ‘기대했지만 말하지 않은 한 가지’에서 시작된다.

이 틈을 일찍 발견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관계를 지켜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따뜻한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