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문의 틈 — 기억은 왜곡될 수밖에 없는 구조
글 · 틈의 기록 | 2025.11.30
“기억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그때마다 다시 쓰여지는 이야기다.”
— 엘리자베스 로프터스(Elizabeth Loftus)
Ⅰ. 기억은 있는 그대로 저장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기억을 ‘사실의 보관함’처럼 여긴다. 하지만 인지심리학은 오래전부터 말해왔다. 기억은 저장되는 순간부터 ‘왜곡’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실제로 뇌는 모든 정보를 그대로 기록하는 장치가 아니다. 자극을 선별하고, 해석하고, 필요한 것만 남기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보았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감정·맥락·의미가 더해진 ‘해석된 경험’을 기억하게 된다.
이때 발생하는 작은 틈, 사실과 해석 사이의 아주 미세한 공간이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의 왜곡’을 만들어 낸다.
Ⅱ. 뇌의 구조적 한계 — 저장보다 ‘재구성’이 먼저다
기억이 왜곡되는 데에는 뇌의 구조적 특성도 영향을 미친다. 뇌는 정보 전체를 저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필요한 조각들을 조합해 ‘그럴 듯한 기억’을 다시 만들어내는 방식을 택한다.
“기억은 저장된 파일을 여는 것이 아니라, 조각난 정보를 다시 구성하는 작업이다.”
—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
그래서 우리는 종종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그 사건을 해석했던 방식을 더 생생하게 기억한다.
즉, 뇌는 사실을 보존하는 기관이 아니라 해석을 만들어내는 기관에 가깝다. 기억의 왜곡은 오류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운 결과다.
Ⅲ. 관계 속 기억 — 타인의 말 한 줄이 기억을 바꾸다
기억은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타인의 말, 표정, 분위기 속에서 기억을 다시 해석하고 재구성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일에 대해 누군가 “그때 너 많이 힘들어 보였어”라고 말하면 우리는 사실보다 감정의 서사를 더 중심에 두게 된다.
“기억은 사회적이다. 우리는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기억을 다시 만든다.”
— 모리스 알바흐스(Maurice Halbwachs)
이처럼 타인의 시선이 들어오는 순간, 기억은 다시 한번 ‘틈’을 만든다. 그 틈 사이로 새로운 해석이 스며들고, 우리는 과거를 조금 다른 색으로 바라보게 된다.
Ⅳ. 감정의 간섭 — 마음이 만드는 기억의 그림자
기억 왜곡의 또 다른 원인은 감정이다. 뇌는 강렬한 감정을 우선적으로 저장하며, 그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을 덮어버리는 역할을 한다.
- 불안은 사건의 부정적 요소를 과장
- 기쁨은 불편한 사실을 희미하게
- 분노는 중립적 정보를 적대적으로 변환
특히 감정과 사실 사이에 생긴 틈은 오래될수록 그 간격이 커진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떠올릴 때, 실제보다 더 아프거나 더 따뜻하게 기억하기도 한다.
“감정은 기억의 프레임을 바꾼다. 어떤 감정이 있는가에 따라 같은 사건이 전혀 다르게 남는다.”
— 리사 펠드먼 배럿(Lisa Feldman Barrett)
Ⅴ. 결론 — 기억은 완전함이 아니라 ‘틈 속의 이야기’다
우리는 종종 “내 기억은 분명해”라고 말하지만, 사실 기억은 분명하기보다 변화하기 쉬운 구조를 갖고 있다.
중요한 것은 기억의 정확도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 존재하는 ‘틈’을 인정하는 태도에 가깝다.
그 틈을 이해할 때 우리는 타인의 기억도, 나의 기억도 하나의 관점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왜곡은 오류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방식과 감정을 반영한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기억은 진실을 담지 못하지만, 진실을 향한 우리의 해석을 담고 있다.”
— 틈의 기록
© 2025 틈의 기록 | 인간의 인지 구조를 탐구하는 ‘학문의 틈’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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