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분의 틈 — 나를 몰아붙이던 오해에 대하여
틈의 기록 · 2026.01.21
Ⅰ. 바꿀 수 없는 것을 붙잡던 시간
나는 이미 끝나버린 것들 앞에서 유난히 오래 머무는 편이다. 되돌릴 수 없는 선택, 이미 굳어버린 관계의 결,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결정된 타인의 판단들.
그 앞에서 나는 쉽게 물러서지 못했다. 조금만 더 설명하면, 조금만 더 버티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 믿음은 희망처럼 보였지만, 실은 놓아버릴 용기가 없다는 고백에 더 가까웠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애쓰던 시간 동안 나는 세상을 설득하기보다 나 자신을 계속 긴장 상태에 묶어 두었다. 모든 가능성을 붙잡고 있어야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붙잡을 때 가장 크게 소모된다.” — 에리히 프롬
그때의 나는 몰랐다. 이미 닫힌 문을 두드리는 일이 의지의 증명이 아니라 불안의 반복일 수 있다는 사실을.
Ⅱ. 바꿀 수 있었지만 움직이지 못했던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분명 선택할 수 있었던 순간들 앞에서는 나는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문서를 열어 둔 채 오래도록 커서만 바라보던 밤들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 시간 동안 나는 결정 이후의 삶 전체를 동시에 상상하고 있었다.
그 주저함을 나는 늘 의지 부족이라 불렀다. 움직이지 않는 나를 스스로 가장 먼저 실망했다.
Ⅲ. 같은 채찍으로 다룬 두 가지 마음
돌이켜보면 가장 큰 문제는 바꿀 수 없는 것 앞의 불안과 바꿀 수 있는 것 앞의 주저함을 나는 전혀 다른 마음임에도 같은 언어로 다뤘다는 데 있다.
둘 다 ‘결정하지 못함’이라는 외형을 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것들을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하나의 이유로 단순화했다. “내가 약해서 그렇다.”
그 순간부터 모든 감정은 설명을 잃었다. 불안은 집착으로, 주저함은 게으름으로 번역되었다. 이해는 사라지고, 관리와 통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사람을 가장 지치게 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지속적인 오해다.” — 알랭 드 보통
나는 나를 다잡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나를 단순한 문제로 취급하고 있었다. 이 마음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묻기보다 왜 아직도 이 상태인지 캐묻는 방식으로.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스스로에게 가장 엄격한 판사가 되어갔다.
Ⅳ. 지침이라는 신호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변화가 찾아왔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더 피곤해진 것이다.
몸은 쉬고 있었지만 마음은 계속해서 나 자신을 설득하고, 다그치고,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 정도도 못 하면 안 된다”는 문장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었다.
그 피로는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오래 나 자신을 이해하지 않은 채 끌고 온 시간의 누적이었다.
지침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이 방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내면의 신호였다. 그 신호를 무시한 채 계속 앞으로만 가려 했을 때, 사람은 서서히 자기 자신을 잃는다.
그제야 나는 질문을 바꾸기 시작했다. “왜 아직도 못 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이 결정을 이렇게 어렵게 만드는가.”
Ⅴ. 그리고 다시, 처음의 문장 앞에서
바꿀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패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불필요한 싸움에서 한 발 물러서는 용기에 가까웠다.
그리고 바꿀 수 있음에도 멈춰 있던 순간들은 비겁함이 아니라 아직 감당할 언어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신호일 수도 있었다.
그 둘을 구분하는 감각은 더 강해지겠다고 다짐할 때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지쳐 멈춰 섰을 때, 비로소 나 자신을 사정청취할 여유가 생겼다.
이 모든 사유는 사실 하나의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너무 오래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던 문장.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 세레니티의 기도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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