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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틈 — 다이어리에 남지 않은 하루들
"우리는 기억하기 위해 쓰지만, 쓰지 못한 것들이 더 오래 남는다." — 수전 손택
Ⅰ. 다이어리를 펼치는 순간
새 다이어리를 펼칠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문장이 아니라 빈 칸이다. 날짜와 요일만 인쇄된 공간은 아직 어떤 사건도, 어떤 감정도 허락하지 않은 상태로 조용히 놓여 있다. 우리는 그 여백 앞에서 묘한 긴장을 느낀다. 이 하루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혹은 이 하루는 채울 만한 가치가 있는가.
다이어리는 기록의 도구이기 이전에 기준의 장치다. 우리는 그 빈 칸을 보며 하루를 평가할 준비를 한다. 의미 있었는지, 성실했는지, 설명할 수 있는지. 그렇게 다이어리는 시간을 저장하는 노트가 아니라, 삶을 선별하는 틀이 된다.
Ⅱ. 적히지 않은 하루의 기억
어느 날, 하루를 마치고 다이어리를 펼쳤지만 끝내 아무것도 쓰지 못한 적이 있다. 특별히 힘들지도, 유난히 기쁘지도 않은 날이었다. 하루 종일 분명 여러 장면이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문장으로 옮길 만큼 또렷하지 않았다.
펜을 쥔 채 몇 번이나 첫 문장을 고쳐 쓰다 결국 다이어리를 덮었다. 그날은 기록되지 않은 하루로 남았다.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 가장 선명하게 남은 것은 그날의 사건이 아니라,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멈춰 있던 그 짧은 침묵이었다.
Ⅲ. 다이어리는 삶의 요약본이다
다이어리는 삶의 복사본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요약본이고, 편집된 결과물이다. 우리는 의미 있다고 판단한 하루만 남기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과 애매한 시간을 조용히 건너뛴다. 그렇게 다이어리 속 삶은 점점 정돈되고, 서사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실제의 삶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날은 명확한 결론 없이 흘러가고, 감정은 문장보다 빠르게 변한다. 다이어리에 적히지 않은 날들은 실패한 날이 아니라,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하던 시간들이다.
"중요한 것은 말해진 것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것이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Ⅳ. 빈 공간이 만들어내는 틈
다이어리의 빈 칸은 결핍이 아니라 틈이다. 그곳에는 판단을 유보한 감정, 방향을 정하지 않은 생각,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아도 되었던 하루가 머문다. 우리는 흔히 기록되지 않은 시간을 공백으로 여기지만, 사실 그곳은 가장 많은 것이 머무는 자리일지도 모른다.
모든 하루가 반드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은 기록되는 순간 의미를 잃고, 기록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온전한 상태로 남는다. 틈은 그렇게 생긴다. 쓰인 문장과 쓰이지 않은 페이지 사이에서.
Ⅴ. 기록의 기준을 다시 묻다
어쩌면 다이어리는 얼마나 많은 문장을 채웠는가보다, 어떤 여백을 남겨두었는가로 우리를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빽빽하게 적힌 페이지보다, 아무 말도 적히지 않은 날이 더 정직하게 삶을 드러낼 때가 있다.
기록의 틈은 그렇게 우리를 사유하게 만든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보다, 무엇을 남기지 않아도 괜찮은가를 묻게 한다. 다이어리에 남지 않은 하루들은 사라진 시간이 아니라, 아직 말을 걸지 않은 삶의 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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