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틈의 사유 - 흔들리는 기준 앞에서 우리가 붙드는 것
“선과 악의 경계는 인간의 마음 한가운데를 가로지른다.”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우리는 ‘절대 선’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하나의 도덕적 범위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이데아와 같아서 우리는 동굴에 비치는 그림자만 보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모든 선이 상대적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자신을 돌아보고 무엇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절대 선은 종종 결과로 인식된다. 언제나 옳은 선택, 누구에게나 유익한 판단, 예외 없는 도덕적 명령. 그러나 경험은 말한다. 그런 선은 현실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 개념을 포기하지 못하는 걸까.
Ⅰ. 변하지 않는 선을 상상하는 이유
절대 선을 상상하는 일은 인간의 불안에서 비롯된다.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판단만으로는 스스로를 설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제의 선택을 오늘 부정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인간에게 견디기 힘든 불확실성으로 다가온다.
절대 선은 이 불안을 잠시 멈추게 한다. 그것은 ‘이 정도면 충분히 돌아봤다’고 말할 수 있게 해 주는 기준선이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더 이상 눈을 돌리지 않아도 된다는 최소한의 윤리적 합의. 이 절대적인 기준 안에서 인간은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절대적인 것은 종종 실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준을 위해 요청된다.”
— 임마누엘 칸트
Ⅱ. 절대 선은 왜 늘 실패하는가
문제는 절대 선이 현실에 적용되는 순간 발생한다. 하나의 기준이 모든 상황을 포괄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누군가는 그 기준 밖으로 밀려난다. 절대적이라 여겨진 선은 예외를 허용하지 않고, 그 예외 속에는 언제나 구체적인 삶이 있다.
역사 속 많은 비극은 ‘의심받지 않는 선’에서 출발했다. 예를 들어, 한 사회가 '공익'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앞세울 때, 개인의 고통은 종종 사소한 부작용으로 취급된다. 모두를 위한 결정이라는 말 뒤에서, 특정 개인이나 소수의 삶은 예외로 밀려난다. 이때 선은 질문을 요구하지 않는 기준이 되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삶은 설명되지 않은 채 침묵 속에 남겨진다. 선이라는 이름으로 질문이 중단될 때, 윤리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 순간 절대 선은 방향을 잃고, 스스로 폭력이 된다.

또 다른 예로, 누군가를 위한다는 확신이 너무 강해질 때, 상대의 의사는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개입하고, 배려라는 이유로 매 순간 결정해 주며, 선이라는 말로 침묵을 요구한다. 이 순간 절대 선은 관계를 보호하는 기준이 아니라, 관계를 통제하는 명분으로 작동한다.
Ⅲ. 틈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
그렇다면 절대 선은 버려야 할 개념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다만 절대 선은 언제나 미완으로 남겨져야 한다. 절대적이기 때문에 완성되지 않은 상태는 우리를 그 앞에서 멈추고, 다시 살필 수 있게 한다.
절대 선의 자리는 확신이 아니라 유보에 가깝다. ‘나는 옳다’가 아니라, ‘나는 아직 충분히 살펴보았는가’를 묻게 만드는 자리. 판단과 판단 사이에 남겨진 이 작은 틈이, 윤리를 살아 있게 한다.
“확신을 완성하는 순간, 윤리는 질문을 멈춘다.”
— 틈의 기록
그래서 절대 선은 우리에게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방향을 남긴다. 쉽게 결정하지 말 것, 타인의 삶을 단순화하지 말 것, 그리고 스스로의 선의를 끝까지 의심해 볼 것.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절대 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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